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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생님 사진
    • 허석도 선생님 | 현대청운고
    • 어느 가을에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비록 왜소한 체구의 중년 여인이었지만 다부진 눈매와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서 당찬 삶의 역정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학교를 방문한 학부모가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 직감과 동시에 어쩌면 제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 듯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교무실을 한번 휘돌아보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어색한 웃음과 함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나에게 와서 반갑게 인사하였다. 내 직관이 맞았다. 그 중년 여인은 아주 오래된 제자였다. 어설피 인사를 받으면서 어딘가 굉장히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물거리는 기억을 선명하게 옮길 수는 없었다. 다행히 그녀가 먼저 의례적인 인사와 함께 자신을 소개한다.

     

     1학년 때 국어를 가르쳤다고 했다. 그때가 1984년도였으니 어느새 43살 아줌마가 되었다면서 크게 웃었다. 순간 어렴풋이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1984년이면 내가 중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을 때이니 이 제자와의 만남은 무려 30년의 세월을 건너 뛴 아주 오래 묵은 인연이었다. 반가움에 중년의 아줌마가 된 제자의 손을 이끌고 교무실 한쪽으로 자리를 옮겨 아슴푸레 잊혔던 30년 전의 기억들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잊혔던 기억들이 퍼즐 맞춰지듯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아직도 제자에게 남아 있는 가장 아픈 기억은 도난사건이었다.

     

     돌이켜보면 바닷가의 한적한 시골마을에 대규모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공사판 인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급하게 만들어진 학교였기에 학생들의 가정환경은 대부분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 당시에 가정방문을 다니다보면 그야말로 거적문에 얼기설기 엮은 판잣집에서 겨우 생활을 이어가는 학생들도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보니 학급에서의 도난사건은 으레 일어나는 일이 되었고, 그 사건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 담임 역량의 큰 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아마 그 당시에 나는 해결을 잘 했던 담임 중 한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반에서 도난사건이 일어나면 나에게 부탁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초짜교사의 정의감으로 아이들을 달래고 협박하면서 돈이나 물건을 훔친 아이를 찾아냈던 기억이 난다.

     

     이 제자의 도난사건 역시 그랬다. 그때 제자의 담임 선생님은 여선생님이었는데 그 학급에서 일어난 도난사건을 나에게 의뢰했고, 나는 전권을 쥐고 사건을 맡았다. 아이들에게 도난사건에 대해서 자기 생각이나 의견을 적어 내도록 했는데 은연 중 아이들이 심증적인 범인으로 주목했던 아이가 바로 이 제자였다.

     

     나는 제자를 불러 아이들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해 주면서 진실을 말해보라고 하였다.

     하지만 제자는 눈물을 흘리며 절대로 자신이 가져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마 당시 나는 제자의 주장을 믿었던 것 같았고, 결국 그 도난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인연으로 나는 제자를 더욱 살갑게 대했고, 공부를 더 시키기 위해 국어시간에 따로 숙제도 내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 그런 기억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졸업 후의 자신의 인생역정을 들려주었다.

     

     당시 제자는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자신의 진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성적이 좋지 않아 울산시내의 고등학교에는 진학할 수가 없었고, 시외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에 그런 아이들이 가장 많이 갔던 곳이 경주에 있는 종합고등학교였다. 지금은 개명하여 일반고로 되어 있는 학교이다.

     

     그래서 그 학교라도 가기위해 원서를 써서 어머니에게 보여드리면서 진학희망을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여자가 시집만 잘 가면 되지 무엇 하러 그 먼 곳을 다니려하느냐면서 원서를 찢어버렸다 했다. 그 뒤로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고, 한동안 무척이나 방황했다고 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면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며 정신을 차렸고, 부모를 벗어나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세상이 녹록치 않아 중졸의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기기술도 배우고, 도장기술도 배우면서 그야말로 남자들이 하는 것은 거의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독하게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 우연히 국비로 지게차 운전을 배우게 되었고, 끼니를 건너가면서 열심히 노력한 끝에 지게차 기사자격증 딸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공사판 현장 곳곳을 전전하다 지금은 경북 포항소재의 항만청에서 자기 지게차를 가지고 당당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다 듣고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거대한 지게차의 무게만큼 짓눌렀을 제자의 과거가 안쓰럽게 여겨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자로 그 작은 체구에 무엇이 이리도 험한 인생역정을 견디게 했는지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물을 수도 없었다.

     

     결혼은 하였느냐고 물었다. 결혼은 첫 결혼에 실패하고 지금은 재혼하였다고 했다. 첫 결혼은 당시 여자로 억센 남자 일을 감당하기 힘들어 함께 일하던 사람과 20살 어린 나이에 일찍 살림을 차렸는데 남편의 바람기로 2년 만에 이혼하고 아이는 당시 울산 어머니에게 맡기고 자기는 포항에서 계속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5년 전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재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남편은 당시 총각이었는데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동생의 신부전증으로 인한 치료비까지 감당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자신은 딸이 달린 재혼의 처지가 상쇄되어 결혼할 수 있었다고 했다. 결국 신부전증인 동생의 치료비까지 감당하면서 어려운 결혼을 하긴 했지만 지금의 자기는 무척이나 행복하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제자를 보내고 가슴 먹먹한 심정으로 교정을 한 바퀴 돈다.

     

     교정에는 어느 새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잔디가 깔린 마당 복판에 아주 오래된 모과나무가 있는데 거기에도 가을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가지에는 주렁주렁 모과가 많이도 열렸다. 그 나무 아래를 보니 채 물들지도 않고 땅에 떨어진 모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주워서 겉에 묻은 흙을 털고 코를 대어본다. 비뚤고 못 생긴데다 모과향도 전혀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모과를 버리지 못했다. 지금은 무척 행복하다며 돌아선 제자의 아련한 모습이 모과에 오버랩 되면서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교무실로 돌아와 내 책상 모서리에 모과를 두었다. 향도 풍기지 않으면서 기우뚱 기운 모습이었지만 왠지 편안하고 행복해 보인다.

     

    비뚤고 못생긴 모과에 아름다운 가을이 깃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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